■ 강신주가 누구? 강신주의 감정수업?
강신주는 연세대학교에서 화학공학 학사 학위를,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각각 철학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007년부터 문사철(文史哲) 기획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강신주는 최근 힐링캠프에 출연하고 여러가지 강의와 토크쇼에 출연하며 일반인에게 유명한 철학자이다.
강신주의 감정수업.
철학과 거리가 먼 내가 이 책을 접하고 나서 느낀건 '꼭 다른 사람도 봤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었다.
살아오며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재미있었다. 볼만하다. 굉장히 좋은 책이다. 라는 생각은 해봤지만,
꼭 읽어보라 라는 마음은 처음이었다.
정신없이 살고있는 요즘에.. '나'자신에 대한 아주 깊고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요즘에..
군입대전 휴식기라고 생각하던 도중 트위터에서 자주 봐왔던 이름 '강신주'가 우연히 떠올랐고 그의 책을 바로 구매했다.
나에게 많은 것을 던져준 책이었다. 정말로 내 '감정'에 대해 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준 책이었다.
철학이라는것이 개인에게 주는 영향과 감정은 다 다를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해준책이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이다.' 라고 대다수의 철학가들이 생각했었다. 과거에는.
하지만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이성과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다른 철학자들과 다르게 현대의 철학자들 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이성은 감정을 자신에게 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다루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지혜롭게 다루는 것이 가장 현명하지 않을까.
■ 감정수업
"감정을 죽이는 것, 혹은 감정을 누르는 것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 하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겠는가. 그러니 다시 감정을 살려내야만 한다. 이것은 삶의 본능이자 삶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유치원 다니는 꼬마들을 봐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좋다. 슬프면 슬프다. 미우면 밉다.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우리는
성인이 되고 여러가지 상황과 시기에 직면해 우리들의 감정을 억누르고 살고있다. 그것이 나에게 덜 피곤하게 하고 덜 지치게 하는
것임을 스스로 자각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감정들을 다 드러내지는 말자. 우리가 여행을 가고 사진을 찍는 것도 어찌보면
여행,사진이라는 매개체로 우리들의 감정을 살리기 위한 것들이 아니겠는가. 정말 사랑스러운 커플의 사진을 찍고, 보는 것은 우리도 그
감정을 살리기 위한 것이고 억눌렸던 감정을 살리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닐까.
- 감정수업 프롤로그 中 일부 -
비루함.
비루함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
자신을 비하하는 감정보다 우리 삶에 더 치명적인 것도 없다. 스스로 비하하니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라는 감정은 강한 자존감 없이는 쉽게 지킬 수 있는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긍심
자긍심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우리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발견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경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경탄
다른 관념과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는 특수한 관념,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을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 없는 어떠한 것들을 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숭고'의 감정이 아닐까?
항상 떠날 준비를 하라! 이것만큼 상대방이 나에게 무관심해지거나 심드렁해지지 않도록 만드는 확실한 방법도 없다. 떠날 수도 있고 머물 수도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곁에 머물 수가 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살 수가 없어요!" 이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레토릭이지, 결코 사실을 묘사하는 말이어서는 안된다.
항상 상대방에 대해 자유로워라! 어떻게 대우해도 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 기쁨을 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한다고 상대방이 생각하는 순간, 그사람은 더 이상 나의 내면을 섬세하게 읽으려는 노력을 접을 것이고, 그만큼 나에 대한 사랑도 식을테니까 말이다.
경쟁심
경쟁심이란 타인이 어떤 사물에 대해 욕망을 가진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 내면에 생기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욕망이다.
우정과 사랑은 모두 어떤 타인과의 만남에서 기쁨을 느끼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우리의 슬픔이 어떤 강도로 발생하는지에
따라 구분된다. 결국 우정과 사랑은 질적인 차이가 있는 감정이 아니라 양적인 차이만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을 가져다주는 타자가 무엇이냐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일 수도,애완동물일 수도, 동성일
수도, 음악일 수도 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경쟁심은 반드시 개입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욕망하는 것을 나도 욕망하는
과정을 꼭 겪을 수 밖에 없으니까.
야심
야심이란 모든 감정을 키우며 강화하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 정서는 거의 정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이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고상한 사람들도 명예욕에 지배된다. 특히 철학자들까지도 명예를 경멸해야 한다고 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다."
문제는 이런 야심이 때로는 원래 들었던 감정이나 욕망을 압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행복한 사람은 주목받기에 충분하다. 이 순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제3자들을 더 의식하고 있는 것이 된다. 어떻게 이런 상태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느 순간 야심이 그들의 사랑을 조금씩 갉아먹다가 끝내 그것을 교살해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아무나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다.
나를 제대로 인정해 준 사람이 나만큼 훌륭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논리가 심리적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야심이 강한 사람은 너무나 취약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위험한 것은 야심이 커질수록 너무나 다양한 감정들,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감정들이 모조리 고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야심은, 적절히 통제해야만 한다.
사랑
자신의 뜻보다 상대방의 뜻에 따라 사는데도 기쁨을 느낄 수 있따는 것. 이것은 오직 사랑에 빠질 때만 가능해진다. 자발적인 노예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다. 한 사람은 제대로 사랑에 빠져 자신을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저 상대방을 자기한테 걸맞는 아내인지의 여부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사랑에 빠지면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주인공이 된다. 주인공이 될 때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할 수 밖에 없고, 조연일 때 우리의 삶은 우울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자신의 꿈과 의지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조연이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서로 동등한 주인공이 아닐 때, 사랑은 비틀거리게 된다. 서로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여자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계속 노력하는데 남자는 더이상 여자를 주인공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이 순간 사랑은 위태로워진다.
대담함
당당한 사람만이 사랑을 해야 하지만, 사랑을 하면 당당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담함.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대담함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사랑이 죽으면 대담함이라는 감정, 온갖 불의와 억압에도 당당할 수 있었던 가장 인간적인 감정도 맥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랑을 지켜라, 그러지 못하면 인간의 모든 고귀한 가치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자긍심도 무기력해질 테니까.
반감
자신이 싫어했던 사람의 모습을 새로 만난 다른 사람에게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섬뜩한 일이다. 이 경우 우리는 그 새로 만난 사람을 싫어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반감이 생기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안타까운 것은, 첫 만남에서 반감을 느꼈을지라도 그가 사실 나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내면을 갖춘 사람일 수도 있고 심지어 행복하게 만들어 줄 사람일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반감에 쉽게 사로잡히는 사람들은 과거 망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모두 기대한다면, 비록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 망령들을 쫓아내야만 하지 않을까?
박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내어줄 수 있을 때 박애라는 감정은 그 빛을 발하게 된다.비참한 사람들보다 더 비참해지려는 결의, 그들보다 더 피곤하려는 결의 , 그들보다 더 가난해지는 결의다.
우리 사회에서 사랑은 커플이나 가족 내부의 문제로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사랑은 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사랑의 원리는 소유의 원리와 달리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겨울의 찬바람에 애인이 떨고 있다면, 누구나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더라도 자신의 옷을 벗어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커플 사이에도 무소유의 원칙, 사랑의 원리가 희석되고 있는 불행한 시대이다. 합리적인 것 처럼 쿨하게 더치페이를 외치고,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바닥에는 자기 것을 지키겠다는 강한 소유 의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전체 인류로 확장되는 사랑의 원리, 즉 박애의 정신이 어떻게 제대로 평가될 수 있겠는가.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주는 것. 이것도 연습이 필요한 시대니까.
연민
사랑은 함께 있을 때는 기쁨을, 반대로
떨어져 있을 때는 슬픔을 가져다주는 감정이다. 이에 반해 연민은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서글픈 감정일 수 밖에 없다.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의 고통을 함께하고 내게 웃음을 주려고 하고 내 눈물을 닦아 주려고 한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인가.이 경우 우리는 상대방이 내게 사랑이나 우정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믿게된다. 애인과 친구의 가치를 알려면 사실 오히려 내가 가장 행복할 때에 진짜 애인인지 가짜 애인인지, 혹은 진짜 친구와 가짜 친구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당신의 행복을 함께 해옵ㄱ해하고 당신의 불행을 함께 불행해하는 사람이어야만이 여러분은 자신에게 애인이나 친구가 있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친구들이 몰려들어 당신을 위로할 것이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그나마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게 인간이다.
탐욕
탐욕이란 부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이자 사랑이다.
절제력이 탐욕에서는 거의 불가능 하다.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최저생계비는 정해질 수 있지만, 최대생계빈느 정할 수 없다는 것, 이것만큼 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욕망을 규정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 뿐만아니라 미래의 집, 음식 그리고 미래의 연인을 모두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돈에 대한 탐욕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끝내 그 무절제함으로 인해 탐욕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말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관심과 애정을 받기 위해 돈을 벌려고 했지만, 돈에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우리는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직접적인 관계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 마치 신에게 헌신하느라 가족과 이웃은 돌아보지도 않는 어느 우매한 아주머니처럼 말이다.
회한
회한이란 희망에 어긋나게 일어난 과거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회한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시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기를 소망한다. 여기서 회한의 감정이 가진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무기력과 비겁의 경험을 배경으로 회한은 꽃피는 법이다. 역설적으로, 회한에 빠진 사람은 이제 자신이 무기력과 비겁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정말로 성숙하고 강해졌다면 결코 회한의 감정이 그를 유령처럼 따라다니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회한에 빠진 사람은 아직도 성숙하지 못하고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회한이라는 슬픈 감정을 떨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중에 회한이 없도록 지금 과감하게 선택하고 당당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 강신주의 감정수업 中 발췌 및 수정 -
■ 책을 읽고나서, 그리고 6개월 만의 글과 블로그에 대해서.
철학적인 책이다. 저자가 철학자이니 그럴수 밖에. 그러나 우리의 편견만큼 따분하지도 머리아프지도 지끈하지도 읽기도 싫은 책은 정말로 아니었다.
많은 것을 던져준다. 돌아보게 해주고 미리 알게 해주고 이런 것이 철학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만 읽고서 복잡하고 혼잡할 지 모른다. 400 장이 넘는 책인데 이 글만 읽고서 100% 느낄 수 있다는게 말이 안되는 것이다.
철학책은 심오하고도 내용이 길 수 밖에 없다. 짧은 몇마디로 자신을 돌아보고 깊게 생각하고 시선을 바꾼다는게 가능하다면 철학자가 힘들 필요도 없고 창작이 어려울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이 길다고 느낀다면 이 책과 글에는 관심도 주지 말길 바란다. 책이라는 것과 글이라는 것이 그런거 아닐까
자신이 겪어보지 경험 못한 혹은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것인데, 그 조차 읽기 싫고 길다면 당신은 그보다 못한 사람이다. 스스로 비루해 지는 것이다.
6개월만의 글이다. 2010년 5월에 블로그를 개설하고, 내 주소를 가졌고 수많은 글을 써왔다.
고등학생에서 이제는 대학생이 된지도 오래되었고 많은 추억이 남아있다.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까..
방문자가 50만명이 되어간다.. 하루에 몇 만의 사람이 방문한 적도 있고 지금처럼 100명도 안되는 시기도 있다.
50만명이 나의 글을 읽었다고 생각하니 어찌보면 뿌듯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4년간 써왔던 글들을 보면서 비공개로 전환한 글들도 꽤 되고 지금 생각해도 잘썼다는 글도 있다.
이제는 블로그가 수많은 사람들이 봐주는 것 보다 기록하고 공유하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글을 보는 사람들이 많은 정보 그리고 많은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
글 하나 쓰기에 몇 시간,며칠이 걸리는 때도 있지만 지금 같은 글 처럼 주 단위가 넘어가는 글들도 많다.
그래서인지 예전보다 포스팅이 늦고 관심이 없어보이긴 하지만, 그만큼 더 만족감은 커졌다.
앞으로 이 블로그는 년간 도메인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계속 유지할 거다. 마치 애완동물 같은 느낌이랄까? 뭔가 같이 살아온 느낌?
항상 어떤 일이나 생각이 복잡할 때마다 방문하고 글을 써왔던 곳이라서 그런 가보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그런 이유도 있겠만서도. 군입대를 앞두고 휴식기를 가지며 아마 몇 개의 글들을 더 쓰지 않을까싶다.
일도 하고 어릴 때부터 해왔던 피아노도 연주하고 독서도 많이 하고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그렇게 다시 나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여태까지 방문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항상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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